-성준이와지윤이2013. 10. 18. 16:30

제5화 지윤이 '두번 살다'


안녕하세요 ^^

오늘은 '운명'이라는 주제로 얘기를 해볼건데요. 여러분은 사람마다 '운명'이라는게 정해져 있다고 믿으시나요? 그렇게 믿으신다면 혹시 그렇게 믿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저는 본래 운명론자는 아닙니다만 제 개인적으로 큰 사고에 휘말리면서 도저히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에서 두번이나 살아남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우리네 인생을 컨트롤 하는 초자연적인 존재' - 그게 하느님이건 알라신이건 간에 - 가 아직 내가 살아있기를 바라는구나라고 느낀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매우 강렬하게 그런 느낌을 받았단 말이죠.

 

 

 


그건 말씀드리자면 두번 다 교통사고였습니다. 한번은 제 실수였고 한번은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그리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여차하면 골로 갈 가능성이 높았던 사고였고, 또 한번은 누가봐도 이 상황에서 살아남으면 기적이었지만 제가 타고 있던 차량의 '특수성' 덕분에 살아남았습니다. 당시 제가 탄 차량이 군용차량이었거든요. 군용차량은 장갑이 매우 두꺼워서 민간차량과 사고가 나면 그 사고충격을 대부분 민간차량이 흡수합니다. 만약 그 당시 제가 탔던 차량이 군용차량이 아니었다면 저는 그 차에 함께 탄 두명의 인원들과 함께 그 자리에서 '세상하직' 했겠지요.

이런 경험을 두번이나 겪고나니 아무리 '무신론자'인 저였지만 진짜 이 세상에는 '신'이 존재하는게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신'이 제게 두번씩이나 기회를 준게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말이죠.

'버크야.... 어차피 나중에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만 넌 꼭 살아서 해야만 할 일이 있단다. 그 일을 이루기전엔 죽어선 안된다.'

살짝 미친 소리처럼 들리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느낌엔 마치 신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는것 같다는거죠. 그런데 저는 아직도 제가 이렇게 살아남아 이루어야만하는 '소명'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때가 되면 전지전능하신 신께서 벼락 한방 때리듯이 번쩍하고 제 머릿속에 심어주시려나요. 모르겠습니다.

네. 갑자기 이런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이유는 제가 아는 '지윤이' 역시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서, '새로 태어나는 기분'을 맛 보았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애가 저와 똑같은 기분을 느꼈는지 그건 알수 없습니다만 적어도 비슷한 기분을 느낀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왜냐면 지금 보니 그 애라는 인간 자체가 확 바뀌었거든요.

'오빠. 오늘 계산은 내가 할게. 그 계산서 이리줘.'

제가 지금까지 지윤이라는 한 인간에 대해 쓴 '보고서'를 잘 읽으신 분이라면 지금 이게 얼마나 제 귀를 의심할만한 말인지 이해가 되시겠죠? 제가 아는 지윤이는 살면서 지금껏 단한번도 이렇게 한 역사가 없는 애 입니다! 지난 '에피소드2'에서 보여드렸던 것과 같은 정말이지 '불가항력적인 상황'만 아니라면 말입니다.

'헐!... 나 잠깐 놀라 자빠져도 되냐? 니가 왠일이냐 대체.... 너 혹시 방금 먹은 음식이 어떻게 잘못된건 아니지?'

제게 살짝 눈을 흘기는 지윤이. 그러지마라 얘야. 오빠 심장 떨리겠다....

'오빤 내가 뭐 맨날 얻어먹기만 하는 거지인줄 알았어? 나도 낼 때가 있다고.'

허!?무.... 물론 내가 너를 '맨날 얻어먹기만 하는 거지'라고까지 생각하진 않지! 하지만 니가 나한테 말을 그렇게 하면 안되지 이 사람아! 니가 지금껏 맨날 나한테 얻어먹기만한건 사실이잖아! 그순간 하마트면 그 애한테 쌍욕할뻔 했습니다....

제가 서른둘 되던 무렵에 업무차 들린 커피숍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 애. 이제 갓 서른을 넘긴 그 애는 세월의 흔적을 찾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여전히 숨막히게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더군요. 뭐 아직 생각이 없다나요.

 

 

 



오랜만에 만난 김에 자리를 옮겨 저녁까지 먹고 나온 우리 두 사람. 그런데 밥값 계산을 그 애가 하는 믿기힘든 광경을 보고서야 저는 그 애가 예전에 제가 알던 '그 애'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너 솔직히 말해라. 오빠한테 거짓말하면 지옥 간다. 너 무슨 일 있었지. 그치?'

순간 쌉싸름해지는 그 애의 표정. 무슨 일이 있었던 것 만은 분명하군요.

'하아.... 나 실은..... 죽다 살았지 뭐야. 요즘 기분이 그래. 뭐랄까 새로 태어난 기분이랄까....'

새로 태어난 기분!
그게 어떤 기분인지 저야 잘 알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라면 백만배쯤은 공감해줄수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전 그걸 두번씩이나 느꼈으니까요.

'아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응. 나 바이크 타잖아. 그게 트럭 밑으로 끌려 들어갔어. 정말 짧은 순간이지만 온갖 생각이 다나더라. 이대로 끝이구나하고....'

그랬군요. 사고 내용에 비해 크게 다치지 않은게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지윤이는 말하다가 그때 기억이 잠깐 났는지 몸서리를 치더군요.

밥 먹고 호프집에서 맥주 한잔 하면서 저는 그 애한테서 자세한 얘기를 들을수 있었습니다. 트럭 바퀴 밑에 깔려 형편없이 부서져 버린 바이크. 그에 비해 가벼운 찰과상 몇개로 끝난 지윤이. 이건 정말 기적이나 다름 없더군요. 설마 신께서 이 간악하게 살아온 여자에게도 '소명' 같은걸 내리시려는걸까요.

'그래서 나 지금까지 내 인생을 돌이켜봤어. 별로 이쁘진 않더라. 한 며칠 동안 그 생각만 했고 눈물도 좀 났어. 솔직히 정말 괴로웠어. 내가 왜 그렇게 살았을까하고....'

그러면서 눈시울을 살짝 적시는 그 애. 정말이지 보기 안쓰럽더군요.

'그래.... 니가 지금이라도 마음을 고쳐먹고 새로 태어난다면 오빤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 아직 니 인생 많이 남았으니까 말이야.'

지윤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저는 싸해진 마음에 그 애의 손이라도 덥썩 잡아주고 싶었습니다.

'오빠 난 이런 생각해.... 신이 있다면 지금 내게 기회를 한번 더 준거라고 말이야. 나 정말 반성하고 제대로 살아보고 싶어. 이게 정말 기회라면 나 이거.... 절대로 흘려보내지 말아야겠지?'

그 애의 이런 독백에 온전히 공감해줄수 있는 사람이 저 말고 또 있을까요. 저는 그 애를 바라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럼! 물론이지! 너 이 차에 아예 그냥 새로 태어났다고 생각해라! 뭐 어려운거 있으면 나한테 얘기하고....'
'고마워 오빠. 날 이해해주는건 오빠 뿐이야. 고마워....'

붉게 젖은 눈을 들어 저를 아프게 바라보는 그 애의 눈빛! 정말이지 남자의 마음 한구석을 찡하게 울리는 묘한 힘이 있더군요. 남자들이 이 애한테 왜 그토록 죽자살자 깊게 빠져드는지 그 자리에서 바로 이해가 될 정도였습니다....

 

 


그로부터 몇달후, 저는 친구 부친상 때문에 대학시절 놀던 멤버들과 간만에 얼굴 볼 일이 있었습니다. 다들 이런저런 자기 일 하느라 바쁘게 살고 있더군요. 자기 가게를 차려서 사장이 된 놈도 있었고, 사업 하다가 한번 말아먹고 새로 준비하는 놈도 있었습니다.

'근데 버크야. 지윤이한테 재혁이 소개시켜준게 너래매. 걔들 다음달에 결혼한다던데. 연락 받았냐?'
'나야 뭐 따로 연락받고 할거 있나. 둘이랑 계속 연락하고 지내는데 뭘.'
'그래?.... 근데 너 말이야. 어떻게 그런 애한테 재혁이 같이 괜찮은 애를 소개시켜줄 생각을 다 했냐. 너 지윤이라면 아주 학을 떼지 않았어?'
'싫어했지. 싫어했는데.... 그게 실은 사연이 있어. 내가 그 애한테 재혁이를 소개시켜준건 물론 그 애가 부탁한 것도 있지만, 일단 그 애 자체가 완전히 새 사람이 됐다고 봤기 때문이야. 너희들 모르겠지만 지윤이 그 애가 몇달전에 바이크 사고를 당하고 거의 죽을뻔 했거든.'
'어? 정말?..... 나도 그랬는데! 와 이거참 희안한 우연이네. 나도 올해 초에 바이크가 트럭 밑으로 끌려들어가는 바람에 저승 구경 한번 할뻔 했다는거 아니냐. 다행히 내 몸이 먼저 튕겨나가는 바람에 찰과상으로 끝났지만 말이야. 그때 같이 끌려들어갔으면 아마.... 저기 내가 누워있었겠지. 으휴! 소름끼쳐.'

그러자 곁에서 얼른 맞장구를 치는 다른 친구.

'맞아. 근데 죽을뻔한 얘기로 치면 우리 중엔 버크 이 녀석이 갑이지. 이 녀석은 지 차로 사고나서 폐차처리한게 한번, 군용트럭 타고 가다가 민간차량이 옆구리 쾅 박은게 한번. 두번이나 죽을뻔 했잖아. 그런 일을 두번씩이나 겪고나니 완전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며. 전에 니가 뭐라 그랬더라.... 신이 너한테 제대로 살 기회를 한번 준 것 같다고 그랬었지?'

그러더니 크게 웃어제끼는 그 녀석. 하지만 저는 따라 웃을수 없었습니다. 제 머릿속에선 지윤이를 만났을때 나눴던 대화들이 마개 뽑은 욕조의 물 마냥 어지럽게 소용돌이 치고 있었습니다.
설마 이건....

'야. 너희 둘! 올해 지윤이 만난 적 있지?'
'어? 너 그거 어떻게 알았냐. 지윤이 그 애가 우리 얘기하든? 뭐라 하던데?'

두 녀석은 궁금한듯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 말도 할수 없었습니다. 그저 실성한 놈처럼 헛웃음만 흘릴 뿐이었습니다.

'으흐흐흐흐히히히히.....'
'헛? 이 자식 돌았나? 갑자기 미친 놈처럼 실실 쪼개긴.... 그러지 마 무서워.'

네. 당했군요. 당했네요. 그날 지윤이 그 애의 묘~한 분위기에 휩쓸려 홀랑 속아버린 제 잘못이 크네요. 아이고. 재혁이 이 놈아! 너 어쩌냐.... 내가 잘못 봤네. 잘못 봤어! 그 앤 변하지 않았네! 그 앤 우리가 알던 '마귀녀 김지윤' 그대로야! 아무래도 내가 너한테 몹쓸 짓 한거 같은데 이거 어쩌냐....

후회막급!!....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 어찌 되돌리겠습니까. 쏟아진 물 어찌 주워담겠습니까.... 둘이 다음달에 결혼한다니 그저 두 사람 별탈없이 잘 살기만 바랄 뿐입니다....

결혼 축하하고 너에 비하면 어린 양처럼 순진하디 순진한 '재혁이' 너무 울리지 않길 바란다. 잘 살아라!.... 이 마귀같은 여인아!!!

Posted by 버크하우스